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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V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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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의 군인·정치인이다. 국방위원장이며 조선로동당의 총 책임자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고,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당 중앙위원회 위원, 비서 등에 선거되고 1970년대부터 부친 김일성주석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로 확정, 자리잡았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제적인 제1통치자가 되었으며,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 이후 6년간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게 되었고, 최근에는 10대 독재자 명단에 올랐다. 그의 이름을 딴 김정일화가 있다.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의 이름을 딴 김일성화도 있다. 후계자는 김정은으로 지목되었다.


생애

광복 뒤 북조선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난다.[2] 1948년 평양의 남산학교 인민반에 입학했고, 졸업후 6·25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후 삼석인민학교로 진학했다.다.[3]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1950년 9월부터 1960 년 8월 사이에 일반 교육 코스를 끝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하고[4] 1953년 2월 10일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김일성장군님의 략전연구소조>를 조직하였다.[5] 남한 정보에 의하면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졸업하였으며 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 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그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1959년 4월에 평양남산고급중학교로 됨)에 진학하여 [9] 1960년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남산고급중학교 재학중 이 학교의 교사가 되고, 교사 겸 남산중 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58년 6월 27일에는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서에 취미를 붙여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맑스-레닌주의저서들을 탐독하고 기계공학과 농학,축산학과 같은 전문기술분야의 책들,사회과학과 문학예술 분야의 책들을 읽기도 했다 한다. 또한 그는 1960년 9월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 1964년 4월에 김일성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김정숙에게 ‘항일의 여성혁명가 백두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화하였고, 북조선 여성이 따라야 할 귀감으로 미화시켰다. 김정숙의 출생지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81년에는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기도 했다.[2] 그가 어머니의 우상화에 공을 들인 것은 계모인 김성애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2] 아버지 김일성은 재혼한 김성애와의 사이에 김평일(폴란드 주재 대사)·김영일(사망)·김경진(오스트리아 주재 북조선 대사 부인) 등 세 자녀를 뒀는데,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이들 및 이들의 후견인격으로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조 선의 식량난

북조선은 1993년부터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자연재해와 사회주의권 나라들의 붕괴, 그리고 서방세력의 경제봉쇄 등으로 최악의 경제난 및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를 북조선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약 6년 간의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북조선은 이제 강성대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고난의 행군 기간동안 국제 사회에서는 약 60만에서 90만명의 사람들이 아사했다고 보고 있다. 2003년에 발표된 국제앰네스티의 리포트에서는 북조선 인구의 절반을 넘는 1300만명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1년에는 미국,한국,일본,유럽연합등으로 부터 $300억 가량의 식량, 비료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 북조선 내에서는 대한민국과 미국 및 일부에서 식량난을 과대선전하는 사례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북한 의 화폐개혁

김정일은 2010년을 기해 북한의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화폐개혁은 실패했다.[29] 그 결과 쌀값이 KG당 북한화폐 20원에서 북한화폐 600원까지 치솟는 참담한 결과물을 초래했다. 화폐의 유동성을 높이기 위해 북한 주민 1인당 새로 발행된 화폐의 소지금액을 제한한 것이 원인이였다. 결국 북한 내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정비율로 나눠준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이름을 팔아 새로 발행된 화폐를 대량으로 바꾸기도 했으며 심지어 국경경비대의 정치지도원들은 남한화폐 500만원과 오토바이1대의 뇌물을 받고 탈북자들을 국경으로 넘어가게 도와주기도 했다.